결혼을 포기하는 청년 세대의 이유 있는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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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포기하는 청년 세대를 향해 "우리 때는 가난해도 결혼하고 애도 낳고 했다."라고 나무라는 기성 세대에게


 어릴 때부터 “결혼할 거냐?”라는 질문에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 결혼이라는 단어가 가까워진 지금은 조금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결혼 안 하냐?”라는 질문에 “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라고 대답한다. 이제 내일 모래면 서른이 다가오는 시기에 이런 생각은 마냥 철이 없는 걸까?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항상 진로 상담 또는 수업의 일환으로 한 ‘20년(혹은 10년) 후의 내 모습’을 적어서 발표하는 일이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10년 후에 당당히 결혼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그런 미래를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부정적으로 그렸다.


 기억으로 추정하면 중학교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먼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모습에서 30대 전후에 사망한 상태로 내 모습을 그렸다. 당시에 선생님과 주변 아이들은 조금 부정적이라고 말하거나 웃고 넘겼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가 30대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이나 연애 같은 핑크색의 단어는 나와 엮일 수가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주인공을 위로한 야마모토가 한 “인생은 말이지, 살아만 있으면 의외로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어.”라는 말처럼, 나도 살다 보니 어떻게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다.


 과연 지난 내 인생을 가치로 평가한다면 1등급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었고,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고,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야기를 적을 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조금씩 변했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결혼, 연애’처럼 사람과 함께 어울려야 하는 일은 낯설다. 낯설다 못해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지금처럼 겨우겨우 생활하는 내가 누군가와 만나 ‘감정’을 나누거나 ‘함께’ 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일은 개인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많은 청년 세대도 공유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로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살아왔지만,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으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다. 기껏 해봤자 좋은 기업 취직이 전부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일이 어려워졌고, 낯선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결혼을 포기하는 청년 세대와 데이트 폭력 등의 사건에 휘말리는 청년 세대의 모습이 자주 사회 문제로 언급되는 이유도 그 탓일 수도 있다.


 보통 결혼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연애 감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도 되겠다.’라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넘은 확신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자신이 손에 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아등바등하는 시대에 몇 명이나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부모의 애정도 시험 성적과 내가 다니는 대학, 내가 다니는 기업을 통해서 차별을 통해 농도와 크기를 재단하는 오늘날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욕심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잘못된 집착은 자신만 아니라 상대를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충동적인 분노가 생긴다.


 그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발생한 사건이 데이트 폭력이다. 데이트 폭력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발산하지 못한 상태로 축적된 ‘분노’라는 감정을 남을 괴롭히거나 인터넷 상에서 혐오를 부추기는 과정으로 조금씩 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그렇게 점점 마음부터 병이 들고 있다.


 당연히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도 자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특징상 “나, 사실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챙겨야 하는 젊은 세대는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결혼이라는 것은 마음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경제력도 받쳐줘야 하지 않는가.



 청와대에 견학을 가는 날에 함께 동승한 노 교수님(뒷좌석이었다)의 말씀을 우연히 들었는데, 정말 오늘날 우리 청년 세대가 하는 생각과 지닌 가치관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생각과 가치관이었다. 그 교수님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아들이 딸 하나만 낳고, 아들을 낳으려고 안 한다. 우리 집 대가 여기서 끊기게 생겼어. 빌어먹을 자식. 아들 안 낳으려면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며느리는 제사를 안 챙겨도 되니 좋으니까. 완전히 남남이 되어 버렸다니까.

요즘 젊은 놈들은 결혼도 안 하려고 한다지. 그게 진짜 문제야.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애도 낳고, 결혼도 하고 해야 하는데! 우리 때는 뭐 돈이 많아서 애를 낳았나? 우리 때는 가난해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서 지금만큼 잘 살 수 있게 했잖아. 여기서 뭘 더 바래? 요즘 누가 못 먹어서 죽나?”


 정말 우리가 흔히 ‘꼰대’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홧김에 좌석에서 머리를 돌려 “우리 청년 세대가 그러는 이유는 말이죠!”라고 말하며 따지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잠자코 그 노 교수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노 교수님이 산 시대의 생활과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생활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청년세대 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분명히 경제력 문제다. 아이 한 명을 기르는 데에 최소 억 단위가 드는 시대에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하다못해 집을 구하는 일도 요즘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 세대의 가치관은 ‘결혼해야 행복할 수 있다.’가 아니라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라는 혼자 사는 시대로 변해가면서 더욱 결혼에 대한 의욕은 떨어지고 있다. 노 교수님의 말처럼 옛날과 비교하면 못 먹어서 죽는 일은 줄었지만, 그렇다고 삶의 질 자체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매번 라면만 먹어도 살 수 있으니 라면만 먹으라고 한다면 누가 두 손 들고 반길 수 있을까. 라면을 먹으면 다음 날에는 자장면도 먹을 수 있고, 다음 날에는 돈가스 혹은 파스타 같은 고급 음식도 먹고 싶은 것이 바로 오늘날 사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욕구는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단계에서 더 커지고 있다.


 혼자서 겨우겨우 높여가는 이 삶의 질을 포기할 정도로 청년 세대는 어리석지 않다. 최진기 강사는 “사람들이 배우면 배울수록 똑똑한 소비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라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한다.”라고 말한다. 즉, 누구나 대학에 가는 오늘날 청년 세대는 그만큼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학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기회비용을 줄이고, 최대의 이익을 보는 선택을 말한다. 과연 청년 세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을까?


 진심으로 내가 이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하겠다고 확신할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는 운명적인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람들은 지나면 식어버릴 감정에 휩쓸려 경제적으로 어려울 게 뻔한 결혼을 하는 일은 잘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혼자 사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나 이외의 사람을 챙겨줄 수가 있겠는가?



 비록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변에서 결혼하는 나이가 한두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친인척과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꼭 그렇지만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결혼을 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동시에 결혼 후 일찍 이혼하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음, 혹은 경제적 요건 하나로 한 결혼’이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볼 때 절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차라리 그렇게 결혼을 통해 마음고생과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을 바에 혼자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내 삶의 질을 높여가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SBS 특별기획으로 방영한 <빅 퀘스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장현성 부부가 출연해 세계의 다양한 부부를 만나며 ‘왜 부부로 사는가?’를 물었다. 당시 프로그램을 통해 본 세계의 다양한 부부 모습은 적잖은 충격을 줬다. 행복이라는 이름, 부부라는 이름이 그렇게 다양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빅 퀘스천>의 ‘왜 부부로 사는가?’ 프로그램에서 접한 여러 이야기 중에서는 부부로 살면서도 생활은 따로 하는 부부가 “부부가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 관계에 대한 강박일 수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때 이 말을 들으면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데, 깊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결혼’과 ‘부부’라는 두 개의 단어가 지니는 형태와 가치가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결혼은 하나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자신의 삶을 새로운 무대로 올리는 이 선택은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선택이기도 있지만, 지금 가진 행복을 포기하는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결혼이라는 선택 앞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 ‘일단 나부터 잘 살아야 행복할 수 있지.’라며 결혼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고 있다. '가난해도 결혼해서 애를 낳으며 살았다'며 결혼하지 않는 청년 세대를 나무라는 기성세대에게 나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못 먹어서 죽는 일은 줄어든 만큼, 우리는 더 질적으로 높은 삶을 원하게 되었다. 아마 청년 세대를 비판하는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성세대 때는 여전히 결혼을 통해 노동력 생산이 중요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 계속해 마이너스만 마주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크게 달라졌다.


 결혼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혼하지 못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오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청년 세대 혹은 기성 세대라면,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결혼은 이제 '포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택지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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